공간

밀실과 광장(1)

Ipse! 2022. 5. 1. 17:52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둬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최인훈, <광장>

자기 자신의 사적인 장소를 갖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인간은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 모두를 필요로 한다. 공적공간이 없이는 사회적 동물의 필요를 충족하기 어렵다.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만나 소통하는 기회가 없는 삶은 공허하다.
사적공간이 없으면 존재의 깊이를 확보하기 어렵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나만의 행동과 사고방식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없는 삶은 병적이며 건조하다.


광장과 밀실을 구분하고 규정하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조건을 찾고, 그에 따라 '의외의' 밀실 공간과 광장 공간을 우리 주변에서 모아 아카이빙 해보자!
예를 들면, 누구나 다 아는 광장의 사례들 .. 베를린의 포츠담 광장, 프라하 구시가 광장 같은 세계 각지의 광장들이 아니라 광장의 이론적 성질을 충족하는 의외의 공간을 찾아보려 한다.

광장
광장은 특정 정체성으로 묶여 집단의식을 형성하고 있는 대중들의 장소여야 한다. 특정 정체성이란 인종, 국적 등 객관적 요소일 수도 있고 종교, 이념, 소속감, 이해관계 등 심리적이고 비가시적인 요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공통 요소를 가진 다수의 사람들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는 광장이 될 수 없다. 같은 국적 혹은 거주지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는 많지만 우리는 그곳 모두를 광장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1) 광장은 축제의 장이 될 수 있어야 한다.
(1)-1 축제는 사회적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이다
이때 축제는 페스티벌 일 수도, 시위가 될 수도 있다. 본디 축제는 '일상을 전복하는 이벤트'이므로 특정 규모 이상으로 발생되는 비일상적이고 전복적인 이벤트는 모두 축제다. 일상과 규범, 즉 사회에서 권장하는 '올바름'이 시행되던 장소에서 특정한 날, 특정한 시간에만 기존의 규범과 규칙을 어기는 것이다. 이는 유일하게 사회적으로 일탈이 허용되는 시간으로, 아폴로적 일상에 디오니소스적인 '틈'을 냄으로써 평소의 질서를 더 잘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한 프로젝트가 끝나면 미친듯이 술먹고 회포를 풀어 마무리하고 이 때 푼 스트레스와 동질감을 기반으로 다음 프로젝트를 더 원활히 진행하고자 하는 의도와 일면 비슷하다.) 즉, 광장은 대중이 평소에 사회적 규범에 의해 억눌려왔던 욕망을 분출시킬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2) 목적성
대중이 모인 목적이 확실해야하고, 광장의 구성원들이 그 목적을 인지하고 스스로가 그 목적 하에 대중의 일원임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제서야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 될 수 있다. 이 때 광장의 개인들은 '개인'으로 취급되지 않고 하나의 덩어리로 간주된다. 이 덩어리는 대개 단체의 이름으로 보도되는데 이 때 개개인의 특징은 광장의 시각에선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밀실
밀실은 개인의 무의식이 발현되는 공간이다. 모든 구조가 천편일률적으로 동일한 성냥갑 아파트일지라도, 각 가구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취향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인간은 본래 자신이 머무는 공간과 정신적으로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공간에 의해 의식이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개개인의 무의식/의식에 따라 공간을 바꾸기도 한다. 인간과 공간은 서로 항상성을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조정하는 생명체인 것이다. (-> '집과 사람의 관계' 참고)

단순히 사면이 벽으로 둘러쌓여 있다고해서 밀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감옥의 독방과 같이 밀폐된 공간이어도 밀실이 아닐 수 있고, 자동차처럼 방의 형태가 아니어도 밀실이 될 수 있다.
밀실의 조건은 '욕구 충족 및 분출이 가능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 때의 욕구는 식욕, 수면욕, 성욕과 같은 기본적인 것을 의미한다.
방의 규모나 구조, 인테리어는 중요하지 않다.
그건 밀실이냐 아니냐의 문제라기 보다는 삶의 질을 다루는 환경의 문제이기 때문에 밀실이냐 아니냐를 규정하는 조건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밀실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욕구를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행할 수 있는가이다. 즉, 국을 손으로 떠먹어도 되고, 빨개벗고 대자로 자도 되고, 변태적인 성취향을 전시하는 등 타인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욕구를 개진할 수 있는 공간이 밀실이다.
위와 같은 행동들을 다른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하면 정신 이상자 취급을 받는다.
밀실이 아닌 곳을 밀실처럼 이용하는 것은 공간들의 위상과 규칙을 오용하는 것이고, 그건 곧 사회 규범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배설욕은 밀실의 기본 조건에서 배제했다. '최소 조건'에 넣기엔 배설욕을 해소할 수 없는 밀실도 다수 존재했기 때문인데, 이 부분은 향후 더 설득력있게 발전시키기로 하자.

그런 점에서 감옥의 독방은 여기서 말하는 밀실은 아니다. 끊임없이 타인의 감시를 받고, 시선의 종착점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규정하고자 하는 밀실은 '개인의 광장'으로서의 공간이기 때문에, 타인의 감시 하에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공간은 밀실이 될 수 없다.
한편 자동차는 밀실이다. 자동차에선 식욕, 수면욕, 성욕을 모두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동차에서의 성욕 해소는 미디어에서 유독 많이 다뤄지는 장면인데 성적 행위와 공간의 관계를 조명한 미디어 이론과 사회학적 관점을 적용해서 바라보면 꽤 유의미한 지점이 된다. 비슷한 예로 근린유대적 마을에서 아파트로 주거 형태가 바뀌면서 과거에 없던 개인 공간이 생기자 이에 대한 은연한 반발과 전복 의지가 미디어, 특히 포르노를 통해 표현되었다는 관점이 존재한다. 가령, 아파트로 주거 형태가 바뀌는 시기에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아파트에서 아내가 바람을 피는' 주제의 포르노가 다수 출시되었는데 이게 밀실 공간이 지닌 욕구 해소의 장으로서의 특성에 대한 사람들의 은연한 불안감(내지는 기대감)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자동차도 이와 같은 용도로 자주 다뤄진다는 점에서 비슷한 위상을 가진다고 생각하면 흥미롭다.

밀실과 권력
밀실 소유력은 곧 권력이다. 권력이 있어서 밀실을 가질 수 있는 것일수도 있고, 밀실을 가지고 있어서 권력을 얻을 수도 있지만 밀실 소유력이 권력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라는 점은 명확하다. 우리가 한 사람의 경제적 자본을 평가하는 척도로 집과 차를 보는 이유도 이 것들이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밀실이기 때문이다.
현재 보편적으로 공감 받는 개인자본의 종류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분류법에 따른 경제 자본, 사회 자본, 문화 자본이다. 그 외 모빌리티 자본, 매력 자본 등 다양한 학자들이 이 분류를 이을 제 4의 자본을 제안하고 있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캐서린 하킴이 주장한 매력자본이 그나마 가능성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모든 의견에 다 공감하진 않지만..) 나는 공간 소유력, 나아가 공간 향유력이 개인 자본의 한 종류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공간은 경제, 사회, 문화 자본 모두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우선 공간을 소유하거나 향유하기 위해선 지불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경제 자본과 연관된다. 또한 비슷한 직업, 소득, 취향의 사람들은 비슷한 공간을 향유 한다는 점에서 사회 자본과도 유관하다. 또, 좋은 공간을 알아보는 시각은 일정 수준 이상의 문화적 소양을 요구하는데 이는 문화 자본과 연결된다.
물론 이런 관점은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자본과의 관계성이 높다는 점에서 돈, 인맥, 교양이 없으면 좋은 밀실 공간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어느정도 맞다고 생각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선 가부장적 문화가 팽배하던 그 시절 유럽에서 여성이 자기 힘으로 성공하기 위해선 '일정 수준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일정 수준의 돈, 즉 경제적 독립이 가능한 최소한의 수준이라도 스스로 번 수입이 있어야 하고 타인의 침입과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 본인이 온전한 독립적 주체로 존재하고 사유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 즉 밀실이 있어야 다른 자본들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독립적 주체로 존재할 수 있는 밀실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큰 자산이다. 독립된 영역에서 자신의 내면을 온전히 쏟아내 표출하고 또 스스로를 직시할 수 있는 순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순간들은 삶을 상상이상으로 풍족하게 한다. (-> '밀실, 사색, 걷기' 참고) 그리고 충분히 다른 자본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의 단초가 된다.

밀실과 무의식
한 사람의 방에 놓인 물건이나 그 방의 쓰레기통을 보면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있다는 샘 고슬링의 <스눕>을 굉장히 재밌게 읽었었다. 병적으로 아무 물건이나 모아 쌓아두는 강박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당장 내 가방에 이 팜플렛을 넣을지 말지 고민할 때도 본인의 필요와 취향을 고려하는데 하물며 자신이 사는 방에 둘 물건을 고를 때엔 신중해지는 법이다. 더군다나 전반적인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물건과 소비, 소유에 대한 관점이 과거와 많이 달라진 오늘날에는 더더욱 물건에 자신의 정체성과 취향을 반영하고자 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서울에 양질의 셀렉샵들이 많이 생기고 있는 것도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물건을 선택해서 두는 것 외에도 밀실은 밀실 주인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여과없이 자신의 욕구대로 생활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의 무의식적 욕망과 취향이 짙게 묻어나는 곳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밀실과 외부의 분리가 철저한데,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밖에서 사람들과 함께 할 때의 나와 밀실에서 혼자 있을 때의 모습에 큰 차이가 있고, 욕구를 억누르고 사는 편이라 나만의 공간에선 자아가 꽤 거친 형태로 분출되어서 내 밀실은 나 자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를 내 방에 초대하는 일이 거의 없다. 나에겐 내 방을 타인에게 보여주는게 벌거벗겨진 모습을 들키는 기분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교수님은 내가 공간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좋게 말씀해주셨던게 생각난다. 반면 자신의 욕망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은 성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밀실을 잘 꾸미고 본인의 색채로 채워 타인을 방에 초대하는 일을 좋아할 것이다. 그 또한 감각과 공간 자본이 높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자 탁월한 능력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누군가의 방에서 그 사람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서재'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재에 꽂힌 책들을 그가 실제로 읽지 않았다고 해도 그에 대해 알 수 있다. '읽고 싶은 책', 그리고 '내 서재에 꽂아두고 싶은 책'이야말로 그가 원하고 되고싶고 그렇게 보이고싶은 모습, 즉 그의 욕망을 가장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누군가를 더 알고 싶을 때엔 좋아하는 책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럼 대부분 유의미한 대답을 준다. 논외로 실제로 미디어 및 영화 이론에선 책이 그 캐릭터의 욕망을 은연중에 보여주는 장치로 자주 사용된다.

나가는 글
내가 관심 갖고 애정하는 '밀실'은 이렇듯 한 개인의 욕망과 무의식과 자아가 온전히 녹아있는 only one 공간이다.
광장에 대한 관심도, 밀실의 특징과 확연히 대비되는 광장이 있기 때문에 밀실의 매력이 더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밀실에 대한 글이 압도적으로 길지만, 앞으로 많은 광장들을 아카이빙 하며 광장에 대한 관심도 잘 가꿔갈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