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04
첫 인상 : 글 잘 쓰는 남미새
내용 : 외국인 유부남이랑 불륜한 썰 푼다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 항변하거나 정당화하려 하지 않고
오로지 상대 남성과 그와의 관계에서 겪는 본인의 감정에만 집중해서 풀어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풀어냈다는 표현은 안 맞는 것 같다. '기록했다'가 맞는듯
하지만 새해 소원 세 개를 전부 남자에게 썼다는 점은 (자기 자신도 두 아들도 아닌) 내 세계관과 너무 달라서 좀 놀라웠다.
아니 에르노의 <탐닉>은 육체적인 관계 묘사에 좀 더 집중해서 재미가 덜 했는데,
이건 심리에 대한 솔직하고 담백한 서술 위주여서 더 잘 읽혔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상대 남성을 묘사할 때 그의 습관에서 보이는 '계층, 문화'를 의식하고 자주 서술하는 점에서 그 티가 난다. 읽다보니 가족에 대한 묘사가 흥미를 유발해서 <한 여자>를 사서 읽었다. 계층적/문화적으로 하류인 원가족에서 벗어나 자신의 힘으로 신분상승하며 겪는 갈등, 부끄러움, 안도감, 배덕감 ..
<단순한 열정>의 마지막 문단에서도 이런 관점이 잘 드러난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같은 것을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사치가 아닐까.
은영쌤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리셨던 시 내용도 생각났다. 선인장에서 자란 꽃에서 사랑을 느끼는 96세 할머니의 시를 보고 '100년 가까이를 살아도 사람에게 사랑주기는 어렵나봐'는 내용이었는데 쌤의 관점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남았다.
다음엔 필립 빌랭의 <포옹>을 읽어봐야겠다.
아니 에르노와 사겼던 젊은 청년인데, 아니 에르노와 사귄 이야기로 소설을 냈다고 한다. 문체도 아니 에르노의 탐닉과 매우 유사하다고 함. 디카프리오와 아니 에르노의 공통점. 자식뻘의 애인을 만나도 때가 되면 쿨하게 놓아주고 커리어에 도움이 됨.
옮긴이의 글 (최정수)
1. 지난 날의 추억은 세월이라는 체를 통과하는 동안 미화되게 마련인데, 아니 에르노는 소름 끼칠 정도의 냉정함으로 자신이 겪은 사랑을 미추의 구분이나 도덕적 판단을 미뤄둔 채 낱낱이 써나가고 있는 것이다.
2. 번역하는 내내 사랑이란 결국 기억이고, 그렇다면 이 작품은 어쩌면 기억에 관한 소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주변의 모든 것이 온통 '그 사람'을 기억하게 하고 환기시킨다. 하지만 머지않아 모든 게 흐릿해지는 순간이 온다. 아무리 소중했던 사랑의 기억도 세월의 무게를 견뎌낼 수는 없다는 듯이 .. 작가는 어쩌면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잊힐 수밖에 없는 사랑의 기억을 영원히 붙잡아두려 했던 것이 아닐까?'
옮긴이의 글이 좋아서 기록해뒀다.
단순한 열정은 연인의 상실보다는 자아의 상실을 다룬 작품이다.
부모의 생애를 다룬 전작이 자연스레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을 기술했다면, 단순한 열정은 인간의 정체성이 어떻게 파괴되는지 보여준다. 힘겹게 성취한 지성인의 지위와 자존이 무너져 결국 인간의 원초적 형질, 잔해만 남는 과정을 가혹하게 진술한다는 점에서 이 연작은 독자를 열광시키며 동시에 불편하게 만든다.
이 책을 읽은 당시에는 이 소감이 공감되어서 기록해둔듯 한데, 지금 옮기며 다시보니 지성인의 자존이 무너지고 자아를 상실했다는 해석은 너무 과한 문구같다. 애초에 불륜을 한다고 무너질 정도로 지성인의 자아가 완전 무결한 것도 아니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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